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나의 점수 : ★★★★
잊혀졌던 지혜, 다시 하나하나 알아가는 기쁨,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잘살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데, 그런데도 그들이 잘살고 있다는 온갖 표시가 있다. 모든 것이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다. 밭은 산허리를 파내어 정교하게 계단식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작물은 빽빽하고 건강하고 마치 예술가가 씨를 뿌린 듯이 보기좋은 무늬를 이루고 있다.
적정 경작면적은 가족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데 집안의 노동인구 1인당 약 1에이커이다. 그 이상은 땅이 별 소용이 없다. 경작할 수 없는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것은 라다크인들이 땅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땅을 잰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경지의 크기를 하루 이틀 하는 식으로 표현한다.)
나는 낯선 사람이 온 것을 조용하게 별일이 아닌 듯이 받아들이는 이 사람들의 태도에 마음이 편안했다.
비만은 너무나 예외적이어서 나는 한번은 어떤 부인이 의사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배에 이상한 주름이 잡혔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말을 백마리 가진 사람이라도 채찍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있다.
-라다크 속담
만족감은 자신이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을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뭐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변화는 더욱 가슴 아프다.
여기는 가난같은 건 없어요
체왕 팔조르 1975년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나 가난해요
체왕 팔조르 1983년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자원의 한계와 그들 각자의 책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늙은 사람들이 우리가 땅을 나누기 시작하고, 인구가 늘어나고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래서는 될 수가 없는데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름답군요."
내가 말했다.
"항아리 없이 버터는 어디에 담아둘 겁니까 헌 우유깡통에 담아두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변하고 있는 라다크가 내게 가르쳐준 가장 충격적인 교훈의 하나는 현대세계의 도구와 기계들이 그 자체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들이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이 전체적으로 시간을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개발의 결과로 현대화된 부문의 라다크 사람들은 기술의 속도로 경쟁해야 하는 경제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은 내 생각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당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일단 전화가 들어와 있으면, 전화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크게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교육은 라다크 사람들을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땅으로부터 유리시켰고 그들을 세계경제라는 사다리의 제일 아래칸에 자리잡게 하였다.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더 밀집해서 살지만 그들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내가 라다크에서 관찰한 악순환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아마도 개인의 불안정이 가족과 공동체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이로 인해 또 개인의 자존심이 더욱 흔들린다는 것이다. 소비주의가 이 전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정서적인 불안정 때문에 물질적인 신분상징에 대한 갈망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자기를 상당한 인물로 만들어줄 소유물을 얻고자 하는 층동을 부추기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물건 자체워 매력보다 훨씬 더 큰 동기이다.실제로는 불가피하게 그 반대의 효과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찬양받고 존경받고 궁극적으로 사랑받기 위해서 물건들을 사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번쩍이는 새 차를 가진 사람은 특별취급을 받아 고럽되고 그래서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더 자신들에게서 또 서로서로에게서 분리되는 순환과정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에서 그리고 나 또한, 극히 필요없는 물질적 대상을 무리해서 소비하는 행태 즉, '지름'이라는 문화에 익숙해져 가는 것같다. 물론 그것의 대상이 단순히 나 자신말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부모, 가족,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자위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무리해서 지를 만큼 인간들의 간극은 더욱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발은 인공적인 결핍을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더 큰 경쟁을 초래하며 사람들에게 그들이 흉내낼 수 없는 표준적인 서구의 모델을 따르라는 압력을 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발에 푸른 눈일 수가 없으며 자동차를 두개 가진 가정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것이 우리의 지구촌에서 떠받들어지는 이상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개발이 파괴를 의미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누려온 사회적 생태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도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그들
은 일반적인 개발방식처럼 그들 자신의 오래된 기초를 무너뜨릴 것이 아
니라 그 기초 위에다 건설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하늘에 닿아보려고 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다시 내려오고 있다. "그 위는 텅비어 있어"라고 말하면서
-계롱 팔단, 마을의 모임에서 1990년
유아용 분유에서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정보는 세계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지역에 도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대중매체나 광고를 통해 실제로 그곳에 도달하는 유혹적인 이미지들은 유독성 쓰레기, 농토유실, 산성비, 지구온난화 같은 것에 대한 경고를 동반하지 않고 있다.
21세기 초, 세계화-반세계화, shift up-shift down, 미국의 패권주의 등의 이야기 꺼리가 있겠지만, 이중 단연 돋보이는 이미지는 바로 자연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무시무시한 자본은 그러한 자연마저도 꿀꺽 삼켜 '웰빙'이라는 돋보이는 깔끔한 이미지로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 같은 제3세계의 우매한 민중들은 유기농, 자연주의 등으로 도배된 인공물을 아무 생각 없이 흡수 해버리니 말이다. 자본의 무시무시함에 비견할 만것으로는, 나치 정도 랄까. 이전에 들은 말중에, 20세기의 대재난인 홀로 코스트를 자연 재해 정도의 파괴력이 있다고 말하며, 그러면 나치는 자연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파괴력도 제3세계의 수탈도 모두 우매한 인간성의 산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본성의 악함을 바라본 순자처럼,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파괴적인 존재일까. 이 책에서 헬레나는 인간의 악함과 나약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믿음을 버리지 말자라는 소망을 담고 있었다.